스피로 애그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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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피로 애그뉴는 1918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공화당으로 전향하여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과 메릴랜드 주지사를 거쳐, 1968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언론과 반전 운동가들을 비판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1973년 탈세 및 뇌물 수수 혐의로 사임했다. 사임 후 뇌물 수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1996년 사망했다. 그의 유산은 신우파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불명예스러운 사임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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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로 애그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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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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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피로 시어도어 애그뉴 |
출생일 | 1918년 11월 9일 |
출생지 |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사망일 | 1996년 9월 17일 |
사망지 | 미국 메릴랜드주 벌린 |
안장지 | 덜레이니 밸리 메모리얼 가든스 |
정당 | 공화당 |
배우자 | 주디 저데핀드(1942년 결혼) |
자녀 | 4명 |
학력 |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볼티모어 대학교 (법학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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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아르덴-알자스 바스토뉴 포위전 중부 유럽 |
복무 기간 | 1941년 - 1945년 |
지휘 | 54 기갑 보병 대대 근무 중대, 10 기갑 사단 |
계급 | 대위 |
훈장 | 동성장 |
미국 부통령 | |
직위 | 부통령 |
대수 | 39대 |
재임 기간 | 1969년 1월 20일 – 1973년 10월 10일 |
대통령 | 리처드 닉슨 |
이전 부통령 | 휴버트 험프리 |
다음 부통령 | 제럴드 포드 |
메릴랜드 주지사 | |
직위 | 주지사 |
대수 | 55대 |
재임 기간 | 1967년 1월 25일 – 1969년 1월 7일 |
이전 주지사 | J. 밀러드 타웨스 |
다음 주지사 | 마빈 맨델 |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 | |
직위 | 볼티모어 카운티장 |
대수 | 3대 |
재임 기간 | 1962년 12월 6일 – 1966년 12월 8일 |
이전 카운티장 | 크리스천 H. 카알 |
다음 카운티장 | 데일 앤더슨 |
2. 어린 시절
스피로 애그뉴는 1918년 11월 9일, 스피로스 아나그노스토풀로스(Spiros Anagnostopoulos)라는 이름으로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타우슨 지구에서 태어났다.[32][33] 그의 아버지 테오도어 스피로스 애그뉴는 그리스 가르갈리아노이 출신의 이민자[1][2]였고, 어머니 마거릿 에이커스는 버지니아주 출신으로, 이전 결혼에서 얻은 두 자녀가 있었다.[34] 애그뉴의 아버지는 1897년 미국으로 이민[3]와 닭고기 수블라키와 스파나코피타로 유명한 간이 식당을 운영했고, 볼티모어 민주당 선거구 지도자로 활동하며 그리스인 공동체에서 잘 알려졌다.
스피로 애그뉴는 민주당원으로 성장했지만, 공화당으로 전향했다.[6] 1957년 정계에 입문하기 전, 제임스 드브로 의원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6] 1950년대에 애그뉴는 미국 하원의원 제임스 데버로의 의회 선거 운동에 자원했다. 애그뉴는 1956년 볼티모어 카운티 의회 공화당 후보가 되기 위해 처음으로 정치에 도전했지만 지역 당 지도자들에게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티켓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의회에서 예상치 못한 공화당의 과반수 승리로 이어졌고, 그의 당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애그뉴는 연봉 3,600달러를 받고 1년 임기의 카운티 항소 심의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준사법 직책은 그의 법률 업무를 중요한 방식으로 보충해 주었고, 애그뉴는 이 임명과 관련된 명성을 반겼다. 1958년 4월, 그는 위원회에 3년 임기로 재임명되었고 위원장이 되었다.
애그뉴는 카운티 행정관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추구하지 않고, 1966년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압도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주에서, 그는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좁은 차이로 승리한 조지 P. 머호니를 꺾고 주지사로 당선되었다.[10] 많은 민주당원들은 인종 분리에 반대하여 애그뉴에게 투표했고, 그 결과 82,000표 차이로 승리했다.[9]
애그뉴는 포레스트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육군에 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복무한 공로로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 전 애그뉴는 보험 회사에서 일하며 엘리노어 주드파인드를 만나 1942년 5월 27일 결혼하여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4]
전쟁 후 애그뉴는 볼티모어 대학교 법학대학원 야간 과정에 다니며, 낮에는 식료품점 점원이나 보험 외판원으로 일했다. 1947년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 개업을 위해 교외로 이주했으며, 1949년 6월 메릴랜드주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3. 초기 정치 경력
1960년 애그뉴는 순회 법원 판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5명의 후보 중 최하위를 기록하며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실패는 그의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카운티 의회를 장악했고, 애그뉴는 항소 심의 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 애그뉴의 전기 작가인 줄스 위트코버는, "민주당의 애그뉴 해임으로 인한 언론의 주목은 그를 '기계'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정직한 봉사자로 만들었다."라고 언급했다.
1962년 애그뉴는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세기에 그 직위에 공화당원이 선출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개혁자이자 공화당의 이방인으로서 민주당의 분열을 이용했다. 애그뉴는 공공 시설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조례를 지지하고 서명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이러한 종류의 첫 법률들 중 하나였다.
애그뉴는 카운티 행정부 수장으로서 4년 임기 동안 새로운 학교 건설, 교사 급여 인상, 경찰서 개편, 상수도 및 하수도 시스템 개선 등 비교적 진보적인 행정을 펼쳤다.[3][7] 그의 차별 금지 법안은 통과되었고, 그에게 진보주의자라는 평판을 안겨주었지만, 인구의 97%가 백인이었던 카운티에서는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그뉴는 공화당 선두 주자인 보수주의자 배리 골드워터에 반대했다. 처음에는 온건파 캘리포니아 상원 의원 토머스 쿠켈을 지지했고, 1964년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온건파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윌리엄 스크랜턴의 후보 지명이 실패한 후, 애그뉴는 마지못해 골드워터를 지지했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시민권 운동과의 관계는 때때로 문제가 있었다. 사유 재산과 관련된 여러 인종 차별 철폐 분쟁에서 애그뉴는 법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고, 어떤 종류의 시위에도 특히 혐오감을 드러냈다. 4명의 어린이가 사망한 앨라배마의 16번가 침례교회 폭탄 테러에 대한 그의 반응은 볼티모어 교회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을 거부하고, 희생자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4. 메릴랜드 주지사
주지사로서 애그뉴는 민주당 의원들과 협력하여 세금 및 사법 개혁, 오염 방지 법률 제정 등을 추진했다.[8]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온건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주의 첫 주거 개방법에 서명했고, 반종독법 폐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암살 사건 이후 발생한 폭동에서, 그는 흑인 지도자들에게 "난 전부의 흑인 인종차별 주의자들을 공개하는 데 당신들을 불렀다."라고 비난하며,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들을 분노하게 했다.[8]
애그뉴 주지사 재임 기간은 세제 개혁, 수질 정화, 인종 간 결혼 금지법 폐지를 포함한 의제로 특징지어졌다.[8]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 보건 프로그램, 고등 교육 및 고용 기회가 확대되었다.[8] 학교의 인종 차별 종식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8] 애그뉴의 공정 주택 법안은 제한적이었으며, 특정 규모 이상의 신규 프로젝트에만 적용되었다.[8] 이는 메이슨-딕슨 선 이남에서 통과된 최초의 그러한 법안이었다.[8] 새로운 주 헌법을 채택하려는 애그뉴의 시도는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8]
대부분의 경우 애그뉴는 주 의회와 다소 거리를 두며 사업가들과의 교류를 선호했다.[8] 이들 중 일부는 그가 주지사직을 구하도록 처음 권유했던 레스터 매츠, 월터 존스와 같은, 카운티 행정관 시절의 동료들이었다.[8] 애그뉴가 사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애나폴리스 주도 관계자들에 의해 주목받았다.[8]
애그뉴는 공개적으로 시민권을 지지했지만 일부 흑인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과격한 전술을 비난했다.[8] 1967년 중반, 흑인들의 불만과 점점 더 적극적인 시민권 지도력으로 인해 인종적 긴장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었다.[8] 여러 도시에서 폭력이 발생했으며, 1967년 7월 24일 과격 학생 지도자 H. 랩 브라운의 선동적인 연설 이후 메릴랜드주 케임브리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8] 애그뉴의 주된 관심사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브라운을 전문적인 선동가로 비난하며 "그를 가두고 열쇠를 버리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8] 케르너 위원회는 폭동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존슨 대통령이 임명했는데, 주요 요인이 제도적인 백인 인종차별이라고 보고하자, 애그뉴는 이를 일축하며 "관대한 분위기와 잘못된 연민"을 비난했다.[8]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암살 이후, 미국 전역에서 광범위한 폭동과 소요가 발생했다.[8] 4월 6일, 문제는 볼티모어에 도달했고, 그 후 3일 밤낮으로 도시가 불탔다.[8] 애그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미국 주 방위군을 소집했다.[8]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6명이 사망했고, 4,000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소방서는 1,200건의 화재에 대응했으며, 광범위한 약탈이 발생했다.[8] 4월 11일, 애그뉴는 100명 이상의 온건한 흑인 지도자들을 메릴랜드 주 의사당으로 소환했는데, 그곳에서 예상했던 건설적인 대화 대신, 그는 보다 과격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한 점을 호되게 비난하고, 그들에게 비겁한 후퇴나 심지어 공모 혐의까지 제기하는 연설을 했다.[8]
5. 부통령 재임
애그뉴는 당시 뉴욕주지사 넬슨 록펠러의 부하이자 공화당의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1968년 공화당 전당 대회가 열리기 얼마 전에 록펠러와 애그뉴는 떨어졌다. 공화당 전당 대회로 들어간 닉슨 혹은 록펠러 아무도 후보 지명을 결말을 짓는 데 충분한 투표들을 가지지 않았으나 닉슨은 거의 충분했다. 닉슨이 가능한 부통령 후보들을 정독하고 자신의 측근으로부터 투입을 위하여 의문하면서 닉슨은 애그뉴에 관하여 국가의 장면에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 자신의 견해에 중도주의자, 그를 고양시키지 않을 것 같고 국내 정세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닉슨의 측근 중 하나가 1968년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닉슨을 후보 지명하는 연설을 하는 데 애그뉴를 초청하였다. 애그뉴는 그렇게 하였다. 나중에 절차에서 닉슨은 공천 후보에 그에게 부통령 후보를 마련하였고 애그뉴는 받아들였다. 애그뉴의 후보 지명은 공화당 안에서 많은 보수주의자들과 닉슨에 의하여 성원되었다. 그러나 소규모 대표단들이 "스피로 누구?"라고 외치기 시작하였고, 후보 지명에 조지 W. 롬니의 이름을 놓으려고 하였다. 닉슨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애그뉴는 6년의 세월에 카운티 행정관에서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선거에 나간 것이다.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빠른 상승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부통령직은 여태까지 그리스계 시민 혹은 메릴랜드 주민에 의하여 도달된 최고 계급의 미국의 정치적 사무직이었다.
적어도 1968년 4월의 소요 사태 이전까지 애그뉴의 이미지는 진보적인 공화당원이었다. 1964년부터 그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의 대통령 야망을 지지했고, 1968년 초, 그 해의 선거가 다가오자 "록펠러 대통령" 시민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12] 1968년 3월 21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록펠러가 출마 포기를 명확하게 밝히자, 애그뉴는 당황하고 굴욕감을 느꼈다.[13]
록펠러의 발표가 있은 지 며칠 만에, 애그뉴는 전 부통령 리처드 닉슨의 지지자들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닉슨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캠페인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애그뉴는 닉슨에 대한 반감이 없었고, 록펠러의 출마 포기 이후 닉슨이 자신의 "차선"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3월 29일 뉴욕에서 둘이 만났을 때, 그들은 쉽게 마음이 통하는 것을 발견했다. 4월 볼티모어 소요 사태 이후 애그뉴의 발언과 행동은 팻 뷰캐넌과 같은 닉슨 진영의 보수주의자들을 기쁘게 했고, 닉슨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4월 30일 록펠러가 다시 선거에 참여하자, 애그뉴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주지사를 잠재적인 "강력한 후보"로 칭찬했지만, 지지를 약속하지는 않았다.
5월 중순, 닉슨은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비드 브로더와의 인터뷰에서 메릴랜드 주지사를 가능한 러닝메이트로 언급했다. 애그뉴가 닉슨과 후보의 수석 보좌관들을 계속 만남에 따라, 그가 닉슨 진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인상이 커졌다. 동시에 애그뉴는 주지사로서 4년 임기를 다하는 것 외에 다른 정치적 야망은 없다고 부인했다.
닉슨이 1968년 8월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는 참모들과 함께 부통령 후보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 중에는 보수적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과 더 진보적인 뉴욕 시장 존 린제이가 있었다. 닉슨은 이처럼 유명한 인물들이 당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린제이는 남부 보수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여겨 덜 분열적인 인물을 찾았다. 그는 선호하는 후보를 밝히지 않았고, 이 단계에서는 애그뉴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애그뉴는 어떤 주요 후보에게도 지지하지 않는 페이버릿 선으로서 자신의 메릴랜드 대표단을 이끌고 전당대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8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전당대회에서 애그뉴는 페이버릿 선 지위를 포기하고 닉슨을 지명했다. 닉슨은 첫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지명을 확보했다. 부통령 후보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 가운데, 닉슨은 여러 당 파벌들이 그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는 당 회의에서 자신이 부통령직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닉슨은 중도주의자를 원한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가 처음 애그뉴를 제안했을 때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다른 가능성들이 논의되었다. 애그뉴는 록펠러 공화당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남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확고한 법과 질서 기록을 가지고 있는 후보로 여겨졌다.[13] 일부 당내 관계자들은 닉슨이 일찍이 애그뉴로 마음을 굳혔고, 다른 후보들을 고려하는 것은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8월 8일, 고문 및 당 지도자들의 최종 회의 후, 닉슨은 애그뉴를 자신의 선택으로 발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에게 이 결정을 발표했다. 대의원들은 그날 늦게 애그뉴를 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한 후 회의를 마쳤다.
수락 연설에서 애그뉴는 전당대회에 "이 순간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애그뉴는 아직 전국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며, 지명에 대한 광범위한 반응은 "스피로가 누구?"였다. 애틀랜타에서 세 명의 보행자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 이름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무슨 병인 것 같아요"; "그건 어떤 종류의 달걀 같아요"; "그는 그 조선 회사를 소유한 그리스인이에요."
1968년, 닉슨-애그뉴 조는 두 명의 주요 경쟁자를 상대해야 했다. 폭력적인 시위로 얼룩진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와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를 기수로 지명했다. 분리주의자 출신인 전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제3 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딥 사우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닉슨은 1952년과 1956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 메이트로서 겪었던 제약들을 염두에 두고, 애그뉴에게 훨씬 더 자유로운 재량권을 부여하고 러닝 메이트가 자신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애그뉴는 또한 1952년 닉슨처럼 "공격견" 역할을 유용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처음에 애그뉴는 중도적인 입장을 보이며 메릴랜드에서의 시민권 기록을 지적했다.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그는 더욱 호전적인 접근 방식을 빠르게 채택하여 강력한 법과 질서 수사를 펼쳤는데, 이는 당의 북부 자유주의자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남부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닉슨의 선거 캠페인 매니저인 존 N. 미첼은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일부 다른 당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러스턴 모턴 상원의원은 애그뉴를 "멍청이"라고 묘사했다.
9월 내내 애그뉴는 언론에 자주 등장했는데, 한 기자가 그의 "공격적이고 때로는 위험한 진부함"이라고 칭한 것 때문이었다. 그는 폴란드계 미국인을 비하하는 용어인 "폴락"을 사용했고, 일본계 미국인 기자에게 "뚱뚱한 왜놈"이라고 지칭했으며, "하나의 슬럼가를 보면 모든 것을 다 본 것이다"라고 말하며 열악한 사회 경제적 상황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험프리를 공산주의에 유화적인 인물로 공격했는데, 이는 영국의 전전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같았다. 애그뉴는 민주당 경쟁자들에게 조롱을 받았고, 험프리 선거 광고에서는 "애그뉴가 부통령?"이라는 메시지를 장기간의 히스테리적인 웃음 소리와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를 배경으로 보여준 뒤 마지막 메시지인 "이건 너무 심각하지 않았다면 웃겼을 텐데..."라는 문구를 내보냈다. 애그뉴의 발언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닉슨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한 우익 포퓰리즘은 남부 주에서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월리스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었다. 애그뉴의 수사는 또한 일부 북부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역사학자 피터 B. 레비가 "정돈, 개인적 책임, 근면의 신성함, 핵가족, 법과 질서"로 정의한 교외 윤리에 더 부합하는 인종적 정의가 덜한 "백인 반발"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월 말, 애그뉴는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메릴랜드에서의 재정 거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폭로 기사에서 살아남았고, 닉슨은 해당 신문을 "가장 저속한 정치"라고 비난했다. 11월 5일 선거에서 공화당은 7,300만 표 중 50만 표 차이로 근소한 대중 투표 다수를 얻으며 승리했다. 선거인단 결과는 더 결정적이었다. 닉슨 301, 험프리 191, 월리스 46. 공화당은 메릴랜드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여론 조사원 루이스 해리스는 애그뉴가 월리스에게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몇몇 경계 주와 상부 남부 주(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테네시, 켄터키)에서 당의 승리를 돕고 전국적으로 교외 지역에서 닉슨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닉슨이 이 5개 주에서 패했다면, 그는 필요한 최소 선거인단 수인 270표만 얻었을 것이고, 선거인의 이탈이 발생했다면 선거는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1968년 선거 직후, 애그뉴는 닉슨이 부통령으로서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선거 며칠 후 플로리다주키 비스케인에서 닉슨과 만났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8년간 부통령을 역임했기에, 애그뉴가 그 직책에서 때때로 경험했던 지루함과 역할 부족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닉슨은 처음에는 애그뉴에게 백악관 웨스트윙에 사무실을 배정했는데, 이는 부통령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1969년 12월에 부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에게 넘어가면서, 애그뉴는 행정실 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겨야 했다.[14] 회의 후 기자들 앞에 선 닉슨은 애그뉴가 부통령이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의례적인 역할을 맡을 필요는 없지만, "이전의 어떤 부통령도 맡지 않았던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닉슨은 기자들에게 연방-주 관계 및 도시 문제와 관련하여 애그뉴의 카운티 행정관 및 주지사 경력을 최대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닉슨은 뉴욕에 정권 인수 본부를 설치했지만, 애그뉴는 11월 27일까지 그곳에서 닉슨과 만나는 데 초청받지 못했고, 그날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만났다. 애그뉴는 이후 기자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책무에 대해 "기분이 좋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정권 인수 기간 동안, 애그뉴는 새로운 지위를 즐기며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는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험프리와 머스키와 함께 골프를 쳤다. 그는 1968년 리버티 볼을 보기 위해 멤피스로 갔고, 닉슨의 딸 줄리와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애그뉴는 볼티모어 콜츠의 팬이었고, 1월에는 팀 구단주 캐럴 로젠블룸의 초청으로 슈퍼볼 III에 참석하여 조 네이머스와 뉴욕 제츠가 콜츠를 16-7로 꺾는 경기를 지켜보았다. 아직 부통령을 위한 공식 거처가 없었기에, 스피로와 주디 애그뉴는 부통령 시절 존슨이 사용했던 워싱턴의 쉐라톤 호텔 스위트룸을 확보했다. 막내딸인 킴만 그들과 함께 이사했고, 다른 자녀들은 메릴랜드에 머물렀다.
정권 인수 기간 동안 애그뉴는 직원을 고용했는데, 카운티 행정관과 주지사 시절 함께 일했던 보좌관들을 몇 명 선택했다. 그는 찰스 스탠리 블레어를 비서실장으로 고용했는데, 블레어는 하원 의원이었고, 애그뉴 밑에서 메릴랜드 주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아서 소머, 애그뉴의 오랜 선거 운동 본부장이 정치 고문이 되었고, 전직 기자였던 허브 톰슨이 언론 담당 비서가 되었다.
애그뉴는 1969년 1월 20일 닉슨과 함께 취임 선서를 했다. 관례대로 그는 취임 선서를 하자마자 자리에 앉았고, 연설을 하지 않았다. 취임 직후 닉슨은 애그뉴를 정부 간 관계실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국가 우주 위원회와 같은 정부 위원회를 이끌도록 했고, 주지사들과 협력하여 범죄를 줄이도록 배정했다. 애그뉴가 고위 보좌진의 핵심 인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새 대통령은 신뢰하는 소수와만 직접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고, 애그뉴가 닉슨이 사소하다고 여긴 문제에 대해 그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짜증을 냈다. 애그뉴가 내각 회의에서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유한 후, 화가 난 닉슨은 밥 할데먼을 보내 애그뉴에게 자신의 의견을 함구하라고 경고했다. 닉슨은 애그뉴가 부통령의 역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른다고 불평했지만, 그 직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애그뉴를 만나지는 않았다. 닉슨 백악관의 커뮤니케이션 담당 이사였던 허브 클라인은 나중에 애그뉴가 할데먼과 존 미첼과 같은 고위 보좌관들에게 휘둘리도록 내버려두었고, 닉슨의 "일관성 없는" 애그뉴 대우가 부통령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애그뉴는 선거 기간 동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자존심이 상했고,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명성을 높이려 했다. 부통령이 상원을 주재하는 것은 단지 동점의 경우에 필요할 때뿐이었지만, 애그뉴는 임기 첫 두 달 동안 매 회기를 시작했고, 첫 해에 앨번 바클리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주재했다. 바클리는 해리 S. 트루먼 밑에서 그 역할을 맡았다. 처음으로 이전 상원 의원이 아니었던 전후 부통령은 의회 기록관과 공화당 위원회 직원의 지도를 받아 상원 절차를 배웠다. 그는 소수의 상원 의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고,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지만, 그는 백악관 직원 회의에 참석하여 도시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닉슨이 참석했을 때는 종종 주지사들의 관점을 제시했다. 애그뉴는 닉슨이 부재한 상태에서 백악관 국내 위원회 회의를 주재했을 때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아이젠하워의 병환 중 닉슨처럼 대통령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애그뉴에게 부여한 많은 위원회 임무는 명예직이었고, 부통령은 형식적인 수장에 불과했다.
애그뉴는 정치적 반대자들, 특히 저널리스와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가들에 관한 자신의 거친 비판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정주의의 수다를 떠는 인도 태수", "음모 음부"와 "역사의 절망적이고 이성을 잃은 연골염"을 포함한 백악관의 연설 완고 작성자들 윌리엄 새파이어와 팻 뷰캐넌에 의하여 어떤 것들이 만들어진 비정상적이고 종종 암시적인 소명으로 알려졌다.
간단히 말해서 애그뉴는 베트남 전쟁에 행정부를 방어할 때 닉슨의 "살인청부업자"였다. 애그뉴는 반전 항의와 전쟁의 매체 묘사들에 대항하는 말은 한 것에 몇몇의 권력적인 연설들을 하는 데 선택되어 그들을 "프랑스의 반미주의"로 불렀다. 애그뉴는 1976년 자신이 대통령을 위하여 나가는 견해와 함께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던 후에 자신의 수사를 낮추고 대부분의 동맹을 끊었다.
애그뉴는 1968년에 있었던 폭력 시위에 대한 타협 없는 비판자로서의 대중적 이미지를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유지했다. 처음에는 취임 후 닉슨의 연설과 마찬가지로 더 화해적인 어조를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폭력에 대한 강경 노선을 촉구하며 1969년 5월 2일 호놀룰루 연설에서 "우리는 자칭 자경단—대항 시위대—이 나타나는 새로운 종을 가지고 있으며, 공무원이 법 집행 당국에 연락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법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조용히 분노하는 광대한 익명의 미국 대중이 있습니다—''그리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69년 10월 14일, 반전 시위 하루 전날, 북베트남 총리 팜 반 동은 미국 내 시위를 지지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닉슨은 이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대신 애그뉴에게 백악관에서 기자 회견을 열게 하여 반전 시위자들에게 북베트남의 지지를 부인하라고 촉구했다. 애그뉴는 이 임무를 훌륭하게 처리했고, 닉슨은 애그뉴에게 민주당을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자신은 논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닉슨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수행했던 역할과 유사했다. 그래서 애그뉴는 "닉슨의 닉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그뉴는 마침내 닉슨 행정부에서 자신이 즐기는 역할을 찾았다.
닉슨은 애그뉴에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연설을 하도록 했다. 10월 19일 뉴올리언스에서 애그뉴는 시위대의 폭력을 용인한 것에 대해 자유주의 엘리트들을 비난했다. 다음 날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애그뉴는 공화당 만찬에서 "너무 오랫동안 남부는 자유주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샌드백이 되어 왔다... 그들의 노선은 결국 미국의 근본적인 구조를 약화시키고 침식시킬 노선입니다." 공화당이 남부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애그뉴는 행정부와 남부 백인들이 엘리트에 대한 불만을 포함하여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레비는 이러한 발언이 1972년 닉슨과 애그뉴의 재선을 확보하기 위해 남부 백인들을 공화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애그뉴의 수사법은 "민주당이 범죄에 대해 관대하고, 비애국적이며, 국기 흔들기보다 국기 태우기를 선호한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향후 20~30년 동안의 문화 전쟁의 청사진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설 참석자들은 열광했지만, 특히 도시 출신의 다른 공화당원들은 공화당 전국 위원회에 애그뉴의 공격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이러한 발언 이후 닉슨은 1969년 11월 3일 침묵하는 다수 연설을 통해 "나의 동료 미국인인 위대한 침묵하는 다수"에게 베트남에서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 연설은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언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언론은 소수의 미국인만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닉슨의 주장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닉슨 연설 작가 팻 뷰캐넌은 이에 대한 연설문을 써서 11월 13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애그뉴가 발표하도록 했다. 백악관은 애그뉴의 연설에 대한 최대한의 노출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고, 방송사들은 이를 생중계하여 부통령에게는 드문 전국적 연설로 만들었다. 위트커에 따르면 "애그뉴는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역사적으로 언론은 상당한 위신과 존경을 누렸지만, 일부 공화당원들은 편향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디모인 연설에서 애그뉴는 언론을 공격하며 닉슨의 연설 직후 "그의 말과 정책은 즉각적인 분석과 짜증스러운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소수의 네트워크 해설가들과 자칭 분석가들에 의해, 그들 대부분은 그가 한 말에 대한 적대감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리 정해져 있었음이 분명했습니다." 애그뉴는 계속해서 "4천만 명의 미국인이 매일 밤 받는 뉴스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고...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는 소수의 해설가들에 의해 걸러질 때 이미 검열의 형태가 존재하는지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애그뉴는 이로써 많은 공화당원과 보수주의자들이 오랫동안 뉴스 매체에 대해 느꼈던 감정을 말로 표현했다. 텔레비전 네트워크 임원과 해설자들은 분노로 반응했다. 줄리안 굿맨, NBC 사장은 애그뉴가 "편견에 호소했다... 미국 부통령이 TV에 언론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CBS의 수장 프랭크 스탠튼은 애그뉴가 언론을 위협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그의 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도 동의했다. 이 연설은 양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애그뉴는 우파에서 지지자를 얻었다. 애그뉴는 디모인 연설을 자신의 가장 훌륭한 순간 중 하나로 간주했다.
11월 20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애그뉴는 뷰캐넌이 다시 작성한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대한 공격으로 앞선 연설을 강화했다. 두 신문 모두 1966년 애그뉴의 주지사 출마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2년 후 그가 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특히 ''포스트''는 1940년대 앨저 히스 사건 이후 닉슨에게 적대적이었다. 애그뉴는 그 신문들이 대부분의 미국인과 이질적인 좁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애그뉴는 신문들이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할 수 있는 수정헌법 제1조의 권리를 침해하려 하는 반면, 자신들에게는 무제한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며 "네트워크 해설자들과 심지어 ''뉴욕 타임스''의 신사들이 자신들의 말에 대한 논평과 비판으로부터 외교적 면책권을 누렸던 시대는 끝났다"고 경고했다.
몽고메리 이후 닉슨은 언론과의 데탕트를 모색했고, 애그뉴의 공격은 끝났다. 11월 말 애그뉴의 지지율은 64%로 치솟았고, ''타임스''는 그를 행정부에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라고 불렀다. 이 연설들은 애그뉴에게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권력 기반을 제공했고, 1976년 선거에서 그의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높였다.
애그뉴가 행정부 반대자들을 공격하고 연설을 펼치는 재능은 그를 공화당 자금 모금 행사에서 인기 있는 연사로 만들었다. 그는 1970년 초 공화당 전국위원회를 위해 40,233.6 km 이상을 여행하며 여러 링컨 데이 행사에 연설했고, 당의 주요 자금 모금자로서 레이건을 대체했다. 애그뉴의 참여는 닉슨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시카고 연설에서 부통령은 "건방진 속물"을 공격했고, 애틀랜타에서는 "침묵하는 다수, 자유 유산과 사법 제도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강력한 목소리를 필요로 한다고 믿는, 매일 법을 준수하는 미국인"과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계속 발언할 것을 약속했다.
애그뉴는 행정부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인물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던 할데만과의 반대 속에서도 닉슨과의 영향력을 높이려 계속 노력했다. 애그뉴는 1970년 4월 22일 국가안보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남아시아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대한 닉슨의 계획에 대한 장애물은 남베트남 군대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은신처로 사용되는 캄보디아 일부 지역에 대한 베트콩의 통제력이 증가하는 것이었다. 닉슨이 국무장관 윌리엄 P. 로저스와 국방장관 멜빈 레이어드로부터 지나치게 비둘기파적인 조언을 받고 있다고 느낀 애그뉴는, 그 은신처가 위협이 된다면 공격하고 무력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캄보디아의 베트콩 진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은 애그뉴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는 사임 후에도 이 결정이 옳다고 확신했다.
전쟁에 대한 계속되는 학생 시위는 애그뉴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4월 28일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에서 열린 연설에서 애그뉴는 불안의 책임은 학생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며, 예일 대학교 동문들에게 총장 킹먼 브루스터를 해고하라고 제안했다. 캄보디아 침공은 캠퍼스에서 더 많은 시위를 불러왔고, 5월 3일 애그뉴는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이 정책을 옹호했다. 닉슨이 취임 연설에서 정치적 담론에서 목소리를 낮추라고 촉구한 것을 상기시키자, 애그뉴는 "불이 났을 때, 사람이 방에 들어가 속삭이지 않습니다 ... 그는 '불이야!'라고 외칩니다. 저도 '불이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불이야!'라고 외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은 다음 날 일어났지만, 애그뉴는 시위대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낮추지 않고, "토론 대신 폭력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일반적인 병폐"에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할데만을 통해 애그뉴에게 학생들에 대한 발언을 삼가라고 전했다. 애그뉴는 이에 강하게 반대하며, 닉슨이 직접 명령할 경우에만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닉슨의 의제는 의회가 민주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받았고, 그는 1970년 중간선거에서 상원을 장악하기를 희망했다. 닉슨과 그의 측근들은 애그뉴가 너무 분열적인 인물이라고 우려하여, 처음에는 애그뉴의 역할을 자금 모금과 개인적인 공격을 피하는 표준적인 연설을 하는 것으로 제한하려고 계획했다. 닉슨 대통령은 사회 문제에 대해 백인, 중산층 및 하위 계층 유권자에게 호소하면 11월에 공화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하지 않고, 논쟁에서 벗어나 침묵하는 다수의 대변인으로서 애그뉴가 선거 운동을 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9월 10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랄프 스미스 공화당 상원 의원을 대신하여 연설하면서, 애그뉴는 가혹한 수사와 기억에 남는 문구로 유명해질 캠페인을 시작했다. 애그뉴는 의회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의 "소심한 아첨"을 공격했고, 애그뉴는 그들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즉 "미국 정치의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애그뉴는 "부정주의의 잘난 nabob들"을 겨냥했다. 그는 급진적인 견해를 옹호하는 정당의 후보는 투표로 떨어뜨려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그해 11월 선거에 출마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뉴욕 상원 의원 찰스 굿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이 효과가 있다고 믿은 닉슨은 9월 24일 백악관에서 애그뉴를 만나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닉슨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이후 록펠러 주지사에 의해 임명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상당히 좌경화된 공화당원 굿웰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굿웰은 희생될 수 있었는데, 보수당 후보 제임스 L. 버클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동료 공화당원의 패배를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닉슨이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애그뉴를 뉴욕으로 보내지 않아, 애그뉴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희망했다. 스크랜턴 위원회의 캠퍼스 폭력 보고서에 대해 굿웰과 장거리 설전을 벌인 후(애그뉴는 이 보고서가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애그뉴는 뉴욕에서 연설을 통해,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버클리를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닉슨이 이 술책의 배후에 있다는 것은 오래 비밀로 유지되지 않았는데, 애그뉴와 닉슨의 고문 머레이 초티너가 이를 밝혔고, 굿웰은 여전히 닉슨의 지지를 믿는다고 말했다. 비록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겨졌지만, 닉슨과 애그뉴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선거 운동에 나섰다.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공화당은 상원에서 단 두 석을 얻었고, 주지사 선거에서 11석을 잃었다. 애그뉴에게
5. 1. 코널리에 대한 대안
1971년 중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히 넓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애그뉴가 사임하도록 유도하고, 미국 헌법 수정 제25조에 따라 존 코널리를 후임 부통령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남부 민주당원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던 코널리는 닉슨이 정치적 재편성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을 통합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고, 이를 통해 공화당을 대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몇 가지 난관이 있었다. 우선 코널리는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의회에서 그의 부통령 임명 비준 과정에서 양당 모두의 반발을 살 수 있었다. 더욱이 코널리 본인이 부통령직을 "쓸모 없는" 직업으로 여기며 내각에서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통령직을 원하지 않았다. 닉슨은 코널리에게 "대체 대통령" 역할을 부여하여 그 어느 때보다 의미있는 직책으로 만들겠다고 설득했지만, 코널리는 결국 거절했다.
결국 닉슨은 애그뉴를 부통령 후보로 유지하고 공개적으로 신임을 표명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1956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자신을 부통령 후보에서 제외하려 했던 사례를 떠올리며, 그러한 시도가 오히려 아이젠하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닉슨은 애그뉴를 "일반적인 책임"으로 보았지만, "극우 성향"의 지지를 통해 비판을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무 장관 존 미첼은 애그뉴가 남부에서 "거의 민속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제거는 당원들의 충성심에 대한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큰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며 애그뉴를 부통령 후보로 유지했다.
하지만 재선 직후, 닉슨은 애그뉴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닉슨은 레임 덕 신분으로 차기 대선에서 애그뉴가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측근 존 에얼릭먼에게 애그뉴가 "어떤 기준으로도 부족하다"며, "에너지? 그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 골프를 치는 것을 좋아한다. 리더십?"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닉슨은 애그뉴의 일관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는 정말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닉슨은 애그뉴를 배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독립 전쟁 200주년 기념 행사를 담당하게 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러나 애그뉴는 이 직책을 거절하며, 200주년 기념 행사가 "패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념 행사 방식에 대한 다양한 의견 때문에 관리자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며, "가능한 대통령 후보는 아무 적들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5. 2. 사임
1972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애그뉴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자연스러운 후임자로 여겨졌다. 당의 우익으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았으며, 1974년 중간 선거 이후 사퇴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소련을 방문하여 자신의 외교 정책 자격 증명을 쌓으려 했다. 그러나 스캔들이 그에게 타격을 입혔다. 닉슨은 애그뉴가 자신을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고, 1973년 4월 그의 측근들이 해고되고 업무가 정리되었다.
1973년 10월 10일, 애그뉴는 존 C. 칼훈에 이어 직무에서 사임한 두 번째 부통령이 되었다. 칼훈은 미국 상원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사임했지만, 애그뉴는 사임 후 메릴랜드 주지사 재직 시절 뇌물로 29,500 달러를 받은 혐의에 대한 협상의 일환으로 탈세 및 돈세탁 혐의에 대해 불항쟁 답변을 했다. 뇌물은 건설업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애그뉴에게 지불한 것이었다. 애그뉴는 볼티모어에서 워싱턴 D.C.로 이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뇌물을 요구했고, 이에 분노한 건설업자들이 정부 증인으로 돌아섰다. 애그뉴는 10,000 달러의 벌금과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0,000 달러 벌금은 1967년부터 "보고되지 않은 소득세"에 대한 세금과 이자 마감만을 보상한 것이었다. 이 거래는 전 메릴랜드 주 법무장관 스티븐 삭스에 의해 "하나님이 이삭을 산 정상에서 살린 이래 가장 큰 거래"라고 조롱받았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의 존 밴즈해프 교수 학생들은 '밴즈해프의 산적들'로 알려졌으며, 뇌물로 받은 총액 268,482 달러를 애그뉴가 주에 갚도록 소송을 제기했다. 애그뉴의 두 번의 항소 후, 그는 직접 사임하고 1983년 초에 268,482 달러 수표를 메릴랜드 주 출납국장 윌리엄 제임스에게 넘겼다. 불항쟁 답변 탄원의 결과로 애그뉴는 메릴랜드 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부분의 사법권과 마찬가지로 메릴랜드 주 변호사들은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며, 불항쟁 답변 탄원은 유죄 인정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의 사임은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25조가 처음으로 발동되는 계기가 되었고, 제럴드 포드가 후임 부통령으로 임명되고 인준되었다. 이는 부통령직 공석을 채우기 위해 수정 조항이 사용된 유일한 사례 중 하나로 남아있다.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해야 했지만, 애그뉴의 조기 사임과 범죄 혐의는 그의 대통령직에 대한 희망을 꺾었다. 둘은 다시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화해의 제스처로 닉슨의 딸들은 1994년 닉슨의 장례식에 애그뉴를 초대했고, 애그뉴는 이를 수락했다. 1996년 애그뉴가 사망했을 때 닉슨의 딸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972년 초, 조지 빌 메릴랜드 지방 검사는 공무원, 건축가, 엔지니어 회사, 포장 계약업체 등이 관련된 볼티모어 카운티의 부패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16] 빌의 목표는 당시 볼티모어 카운티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다.[16] 애그뉴가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빌은 처음에는 이를 무시했다.[16] 애그뉴는 1966년 12월 이후 카운티 행정관을 역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 직책을 맡고 있는 동안 저질렀을 수 있는 모든 불법 행위는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기소될 수 없었다.[16] 조사의 일환으로 레스터 매츠의 엔지니어링 회사에 소환장이 발부되었고, 그의 변호사를 통해 수사에 협조하는 대가로 면책을 요구했다.[16] 매츠는 애그뉴의 영향력을 통해 받은 계약의 가치의 5%를 애그뉴에게 돌려주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타우슨에서 그가 카운티 행정관으로 재직할 때의 카운티 계약이었고, 이후 애그뉴가 주지사로 재직할 때의 주 계약이었다.[16]
탐사 보도 기자들과 민주당 활동가들은 메릴랜드 공무원 시절 애그뉴가 부패했다는 소문을 쫓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없었다. 1973년 2월, 애그뉴는 이 조사를 듣고 법무장관 리처드 클라인디엔스트에게 빌에게 연락하도록 했다. 부통령의 개인 변호사 조지 화이트는 빌을 방문하여 애그뉴는 조사 대상이 아니며, 검찰은 애그뉴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6월에 매츠의 변호사는 빌에게 그의 의뢰인이 애그뉴가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지불이 부통령 재임 기간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밝혔다. 공소 시효는 애그뉴가 이 이후의 지불에 대해 기소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7월 3일, 빌은 신임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달 말에 닉슨은 그의 백악관 비서실장 알렉산더 헤이그를 통해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애그뉴는 이미 닉슨과 헤이그를 만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8월 1일, 빌은 애그뉴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 부통령이 탈세 및 부패 혐의로 수사받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매츠는 백악관에서 애그뉴를 만나 현금 1만 달러를 건넸다고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 다른 증인인 메릴랜드 도로 위원회 책임자 제롬 B. 울프는 빌이 말했듯이 "당시 주지사 애그뉴와 함께 참여했던 모든 부패한 지불"을 자세히 설명하는 광범위한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16]
닉슨이 이 조사에 대한 책임을 개인적으로 지도록 명령한 리처드슨은 8월 6일 애그뉴와 그의 변호사를 만나 사건 개요를 설명했지만, 애그뉴는 매츠 회사의 선정이 일상적인 일이었고 돈은 선거 기부금이라고 말하며 책임을 부인했다. 그 이야기는 그날 늦게 ''월스트리트 저널''에 보도되었다. 애그뉴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고, 8월 8일 기자 회견을 열어 그 이야기를 "지독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8월 7일 회의에서 닉슨은 애그뉴에게 전적인 신뢰를 표명했지만, 헤이그는 애그뉴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혐의가 입증될 경우 애그뉴가 기소 전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시점에서 닉슨의 사임을 초래할 워터게이트 수사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그 후 두 달 동안 각 스캔들의 새로운 폭로는 거의 매일 신문에 실렸다.
사임을 요구하는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애그뉴는 현직 부통령은 기소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9월 25일 하원의장 칼 앨버트를 만나 조사를 요청했다. 그는 캐비닛 멤버였을 때 부적절한 지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존 C. 칼훈 부통령에 대한 1826년 하원 조사를 선례로 들었다. 애그뉴에 이어 대통령직 승계 서열 2위인 앨버트는 법원이 처리해야 할 문제에 대해 하원이 행동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애그뉴는 또한 법무부의 부적절한 유출로 인해 편견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소를 막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고, 여론을 모으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친화적인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검찰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그뉴는 징역형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플리바겐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17] 그는 회고록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위기로 인해 지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서 플리바겐에 들어갔다고 썼다. 그는 10월 5일에 결정을 내렸고, 그 후 며칠 동안 플리바겐 협상이 진행되었다. 10월 9일, 애그뉴는 백악관에서 닉슨을 방문하여 자신의 사임이 임박했음을 대통령에게 알렸다.
1973년 10월 10일, 애그뉴는 볼티모어 연방 법원에 출두하여 1967년 탈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지 않음''(nolo contendere)을 인정했다. 리처드슨은 애그뉴에 대한 추가 기소는 없을 것이라고 동의하고 증거 40페이지 요약을 발표했다. 애그뉴는 1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3년간의 감독 없는 보호 관찰을 받았다. 법정에 들어가기 직전에 애그뉴는 보좌관에게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공식 사임 서한을 제출하도록 했고, 닉슨에게 국가의 최선을 위해 사임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닉슨은 이 사임이 길고 분열과 불확실성의 시기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며, 애그뉴의 애국심과 미국의 복지에 대한 헌신에 찬사를 보낸다는 내용의 서한으로 답했다.
1969년부터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다. 닉슨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유사하며, 애그뉴는 "닉슨의 닉슨"이라고 불렸다. 애그뉴는 닉슨 행정부에서 대통령이 원했던 역할을 수행했다.
뉴올리언스에서 애그뉴는 시위 참가자들의 폭력을 용인하는 진보적인 엘리트를 비난했다.
한편, 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인 1972년 초부터 애그뉴가 카운티장 및 주지사 시절에 수주자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볼티모어를 관할하는 연방 지방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애그뉴가 수사를 알게 된 것은 재선 직후인 1973년 2월이었으며, 8월 1일에 조지 비일 연방 지방 검사가 공식적으로 탈세 및 부정부패에 대한 수사를 통고했다. 이에 대해 애그뉴는 "나에 대해 여러 비난이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만약 기소되더라도, 나는 사임하지 않겠다![35]"라고 강경하게 나섰다. 그러나 10월 10일에 탈세 혐의에 대해 다투지 않는(불항쟁) 사법 거래를 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은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 중이었지만, 애그뉴 사임 10일 후인 10월 20일에 소위 "토요일 밤의 학살"이 일어난 것도 겹쳐, 닉슨 행정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후임 부통령은 닉슨에 의해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였던 제럴드 포드가 지명되었고, 11월 27일 상원에서 승인, 12월 6일 하원에서 승인되어 정식으로 취임했다.
부통령 사임 후인 1974년, 애그뉴는 윤리 결여를 이유로 법조 자격 박탈 법원 명령을 받았다. 1981년에는 애그뉴가 받았다고 하는 리베이트를 주에 반환하라는 민간인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여, 이자를 포함한 약 25만 달러를 주에 지불하게 되었다. 이 판결에서는, 리베이트 수수가 부통령 재임 기간까지 계속되었다고 인정되었다[36]。
1996년에 77세로 사망했다.
6. 이후의 생애
자신의 사임에 이어 애그뉴는 소득세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0,000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으며 3년간 비지도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 메릴랜드주는 그를 법률 실행으로부터 그를 막았다.[18][19] 그 후에 그는 메릴랜드주의 아널드, 보위와 오션시티와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에 저택들과 함께 국제 무역 행정관이 되었다.[3] 한 거래는 이라크군에 군복을 공급하는 계약과 관련이 있었고, 이는 사담 후세인과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협상을 포함했다.[3]
1976년 그는 잠시 대중의 주목으로 들어가 유대인들에 관하여 제럴드 포드가 공공연하게 "불미스러운" 말들로서 비판한 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기독교인들에 나쁜 대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국가를 위하여 그 성원을 철회하는 데 미국을 요구한 반시온주의와 함께 논란을 일으켰다.[20] 애그뉴는 반유대주의나 편견을 부인하며 "내 주장은 미국의 뉴스 매체가 ... 균형적인 방식으로 다른 형평성을 제시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을 선호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2]
1980년 애그뉴는 만약 자신이 부통령직을 사임한다면 닉슨과 알렉산더 헤이그가 자신을 암살하는 데 계획한 것을 자신이 암시한 회고록을 펴냈다. 또한 그해 그는 메릴랜드주로부터 의회를 위하여 나가는 데 숙고하였고, 그러고나서 반대 결정을 하였다. 애그뉴는 "자신의 야망에 의하여 파괴된" 부통령에 관한 소설 〈캔필드 결정〉을 저서하였다. 닉슨의 측근이자 조언자 에얼릭먼이 1972년 대선에서 공천 후보에 왜 닉슨이 애그뉴를 유지하였나를 의문했을 때 닉슨은 "그의 마음 속의 암살자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1980년, 애그뉴는 회고록 ''조용히... 그렇지 않으면''을 출판했다.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사임을 초래한 혐의에 대한 완전한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무죄 주장은 전 변호사 조지 화이트가 그의 의뢰인이 주 의사당 뇌물 수수를 인정했으며, 이것이 "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고 증언하면서 훼손되었다.[25] 애그뉴는 또한 새로운 주장을 했다. 즉, 그는 백악관 비서실장 알렉산더 헤이그로부터 "조용히 가라" 그렇지 않으면 암살의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사임했다는 것이다. 헤이그는 이 이야기가 "터무니없다"고 부인했고, 애그뉴에게 이 경고를 보고했다고 여겨지는 애그뉴 측근도 "신체적 해를 입을 위협은 결코 없었다"고 부인했다. 애그뉴의 전기 작가 조셉 P. 코피는 이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묘사한다.
''조용히 가라'' 출판 이후, 애그뉴는 대중의 시야에서 크게 사라졌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의 존 F. 반자프 3세 교수의 학생들은 메릴랜드주에 거주하는 세 명의 사람들이 공무원으로서 뇌물로 받았다고 여겨지는 268,482달러(이자 및 벌금 포함)를 주에 상환하도록 애그뉴에게 요구하는 소송에 기꺼이 이름을 올렸다. 1981년, 판사는 "애그뉴 씨는 어떤 이론으로도 이 돈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고 그에게 뇌물에 대해 147,500달러, 이자로 101,235달러를 주에 지불하라고 명령했다.[26] 애그뉴의 두 번의 항소가 실패한 후, 그는 마침내 1983년에 그 금액을 지불했다.[27][28]
애그뉴는 남은 생애 동안 언론과 워싱턴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1994년 닉슨이 사망했을 때, 그의 딸들은 애그뉴를 요바린다,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초대했다. 그는 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날에 백악관으로부터 자신이 받았던 대우에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수년에 걸쳐 그는 닉슨 측에서 관계를 회복하려는 다양한 제안을 거부했었다. 그는 초대를 수락하도록 설득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옛 동료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20년의 분노를 뒤로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1년 후, 애그뉴는 다른 부통령들의 흉상과 함께 놓일 그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나타났다. 애그뉴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사람들이 ... 상원이 이 흉상을 의뢰함으로써 내가 자격이 없는 영예를 준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 이 행사가 내가 맡았던 직무보다 스피로 애그뉴와 더 관련이 적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1996년 9월 16일, 애그뉴는 메릴랜드주 오션시티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쓰러졌다. 그는 메릴랜드주 베를린에 있는 애틀랜틱 제너럴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다음날 저녁 사망했다. 사인은 진단되지 않은 급성 백혈병이었다. 메릴랜드주 티모니엄에서 열린 장례식은 주로 가족들만 참석했다. 부캐넌과 애그뉴의 전직 비밀 경호원들도 그의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참석했다.[30] 부통령으로서의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통합 군의 명예 경비대가 묘지에서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31]
7. 유산
애그뉴는 닉슨 행정부로부터 사임으로, 그리고 특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자들과 거래에서 닉슨의 "살인청부업자"로서 최고로 기억될 것이다. 닉슨 자신의 후속 사임은 대통령직으로 자신의 후임자로서 애그뉴를 놓았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정치적 명성에 대한 급격한 상승에 불구하고 그는 빠르게 대중의 마음에서 벗어났다.
1996년 9월 17일 애그뉴는 백혈병의 형성으로 아직까지 감지되지 않은 고급과 함께 입원하여 진단을 받은지 몇시간 후에 벌린에 있는 애틀랜틱 종합 병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볼티모어 카운티의 티모니엄에 있는 묘지 덜레이니 기념 정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통령직 문서와 다른 문서들의 대부분은 메릴랜드 대학교 혼베이크 도서관에 간수되었다.
애그뉴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유산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식되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상황, 특히 그가 법과 질서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모든 부류의 정치인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야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불명예는 잠재적인 부통령 선택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 이후 주요 정당에서 선택한 러닝메이트 대부분은 월터 먼데일, 조지 H. W. 부시, 로이드 벤슨, 앨 고어, 잭 켐프, 조 리버먼, 딕 체니 그리고 조 바이든과 같은 노련한 정치인들이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최근 일부 역사가들은 애그뉴를 신우파의 발전에 중요한 인물로 보고 있으며, 골드워터와 레이건과 같은 이 운동의 인정받는 창시자들과 함께 그를 기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빅터 골드, 애그뉴의 전 언론 비서는 그를 이 운동의 "세례 요한"으로 여겼다. 존슨 시대 자유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64년 골드워터의 운동은 너무 일찍 시작되었지만, 애그뉴가 선출될 즈음에는 자유주의가 쇠퇴하고 있었고, 1968년 이후 애그뉴가 우익으로 기울면서 국가는 그와 함께 움직였다. 애그뉴의 몰락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신우파의 성장을 저해하지는 못했다.최초로 고위직에 오른 교외 출신 정치인인 애그뉴는 전국 언론의 상당 부분이 엘리트적이고 무능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된다는 시각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레비는 애그뉴가 "공화당을 '중산층 미국인'의 정당으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고, 심지어 불명예스러운 상황에서도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강화했다"고 언급했다.
볼티모어에서 시작해 대통령직 승계 서열 2위에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애그뉴 자신에게는 "역사의 심판이 이미 그에게 내려졌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불명예스럽게 사임한 최초의 미국의 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공적 생활에서 그가 성취했거나 성취하려 했던 모든 것… 그 비극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행위에 묻혀버렸다".
레비는 애그뉴의 경력에 대한 "만약 그랬더라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만약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닉슨의 책임 부인만큼이나 골드워터와 다른 몇몇 확고한 보수주의자들이 원했던 것처럼 부패 혐의에 대해 반대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애그뉴-민주당과 애그뉴노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애그뉴를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여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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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선거인단) | 결과 | 당락 |
---|---|---|---|---|---|---|---|
1966년 선거 | 메릴랜드 주지사 | 55대 | 공화당 | 49.50% | 455,318표 | 1위 | |
1968년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39대 | 공화당 | 43.42% | 31,783,783표 (301명) | 1위 | |
1972년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39대 | 공화당 | 60.69% | 47,169,911표 (520명) | 1위 | 25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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